애증 — 미워하면서도 놓지 못하는 마음
한국 드라마를 보다 보면 영어 자막에 “love-hate”가 뜨는 장면이 있다. 형이 동생을 노려보는데 눈빛이 미움만은 아닌 순간, 20년 라이벌이 상대의 부고를 듣고 말없이 술을 따르는 순간이다. 그때 한국어 대사에 자주 얹히는 말이 애증 (aejeung) 이다.
애증 (aejeung) 은 한 사람이나 대상을 향해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얽혀 있는 감정이라는 뜻이다. 좋아하는데 밉고, 미운데도 끊어내지 못하는 상태다. 사랑했다가 미워하게 된 것도 아니고, 미워하다가 사랑하게 된 것도 아니다. 두 감정이 순서 없이 같은 자리에 겹쳐 있다는 것이 이 단어의 핵심이다.
그래서 애증에는 반드시 시간이 들어간다. 오래 붙어 있었고, 그동안 좋은 일도 상처도 함께 쌓였고, 그런데도 관계가 끊기지 않았을 때 비로소 이 말이 성립한다. 한 달 만난 사람, 어제 산 물건에는 애증이 생기지 않는다. 그냥 실망이고 후회다.
품사는 명사다. 실제로는 혼자 쓰이기보다 아래 형태로 자주 붙어 다닌다.
- 애증의 관계 (aejeung-ui gwangye) — 사랑과 미움이 뒤섞인 사이
- 애증이 교차하다 (aejeung-i gyochahada) — 두 감정이 엇갈려 지나가다
- 애증이 쌓이다 (aejeung-i ssahida) — 오랜 시간에 걸쳐 그 감정이 누적되다
- 애증 어린 눈빛 (aejeung eorin nunbit) — 그 감정이 배어 있는 시선
참고로 “애증하다”라는 동사형은 거의 쓰지 않는다. 한국 사람은 “그 사람을 애증해”라고 말하지 않고 “그 사람한테는 애증이 있어”, “우리는 애증의 관계야”라고 말한다.
실제 대화로 보기
상황: 토요일 아침 아파트 앞. 준경이 8년 탄 자전거를 중고로 팔기로 하고 구매자를 기다리는 중이다.
준경: 아, 진짜 팔아야 되나. 이거 체인만 세 번 갈았어. Ah, do I really have to sell it? I replaced the chain three times on this thing.
에밀리: 아까부터 계속 안장 만지작거리더라. 그냥 두고 가기 싫지? You’ve been fiddling with the seat this whole time. You don’t want to just leave it, do you?
준경: 싫지. 나한테 얘는 애증이야. 비 오는 날마다 미끄러져서 욕도 엄청 했는데. I don’t. This thing is love-hate for me. It skidded every rainy day and I cursed at it a lot.
에밀리: 그 마음 알아. 나도 첫 자취방이 딱 그랬어. 곰팡이 때문에 애증의 3년. I know that feeling. My first place was exactly like that. Three love-hate years, because of the mold.
준경: 야, 근데 너 그 방 나올 때 울었다며. Hey, but I heard you cried when you moved out of that place.
에밀리: 울었지. 미운데 정든 거야. 그게 애증이지 뭐. I did. I hated it but I got attached. That’s what love-hate is.
준경: …그냥 안 팔면 안 되나. …Can’t I just not sell it?
에밀리: 안 되긴. 저기 구매자분 오셨어. Of course you can’t. The buyer’s here.
이렇게 쓰면 어색합니다
✗ (소개팅 두 번째 만남에서) 우리도 이제 애증의 사이인가 봐요. ✓ (10년 된 친구에게) 우리 진짜 애증의 사이다, 그치? → 애증은 세월이 쌓여야 생기는 감정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에 쓰면 농담으로도 무겁고, 상대는 “내가 언제 이 사람을 미워하게 했지?” 하고 당황한다.
✗ (회식 자리에서 부장님께) 부장님, 저는 부장님께 애증이 있습니다. ✓ (퇴사한 뒤 친구에게) 그 부장님은 나한테 애증이지. 배운 것도 많은데 진짜 힘들었어. → 애증에는 “미움” 절반이 그대로 들어 있다. 당사자 앞에서 꺼내면 애정 고백이 아니라 미움의 공개 선언이 된다. 이 말은 보통 그 자리에 없는 대상을 두고, 혹은 혼잣말처럼 쓴다.
상황별 활용 예문
1) 오래 다닌 회사를 그만두는 날
야근에 시달리며 매일 그만두겠다고 했던 사람이 막상 마지막 날 사원증을 반납하고 나오면서 하는 말이다.
10년 다닌 회사라 그런가, 나오는 날엔 애증이 확 밀려오더라. (10 nyeon danin hoesa-ra geureon-ga, naoneun nal-en aejeung-i hwak millyeo-odeora.) Maybe because I was there ten years — on my last day, this love-hate feeling just washed over me.
2) 떠나고 싶었던 고향에 다시 돌아왔을 때
서울로 도망치듯 올라갔다가 결국 몇 년 만에 다시 내려온 사람이, 동네 어귀를 보며 하는 말이다.
나한테 이 동네는 애증의 동네야.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데 결국 다시 왔네. (na-hante i dongne-neun aejeung-ui dongne-ya. ppalli beoseonago sipeonneunde gyeolguk dasi wanne.) This neighborhood is a love-hate place for me. I couldn’t wait to get out, and here I am again.
3) 매년 실망시키는데도 계속 보는 스포츠 팀
한국에서 이 단어가 가장 가볍고 유쾌하게 쓰이는 자리다. 야구·축구 팬들이 자기 팀을 두고 자주 쓴다.
우리 팀은 진짜 애증이지. 매년 욕하면서 또 보고 있잖아. (uri tim-eun jinjja aejeung-iji. maenyeon yok-hamyeonseo tto bogo itjana.) My team is pure love-hate. I curse them out every year and I’m still watching.
존댓말·반말과 비슷한 표현
애증은 명사라서 그 자체에 높임과 낮춤이 없다. 문장 끝을 바꿔 쓰면 된다 — 반말은 애증이야 (aejeung-iya), 존댓말은 애증입니다 (aejeung-imnida) 다. 다만 위에서 본 것처럼 상대가 그 감정의 당사자일 때는 존댓말로 바꾼다고 해서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문제는 말투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미움을 꺼냈다는 사실이다.
비슷해 보이는 말들과 견주면 온도 차가 분명해진다.
| 표현 | 온도·강도 | 쓰는 자리 |
|---|---|---|
| 애증 (aejeung) | 무겁다. 사랑과 미움이 거의 같은 크기 | 오래 얽힌 사람·장소·대상. 진지한 대화나 독백 |
| 미운 정 (miun jeong) | 따뜻한 쪽으로 기운다 | 가족·오랜 동료. 웃으면서 하는 일상 대화 |
| 원망 (wonmang) | 미움 쪽으로 기운다. 사랑은 거의 없음 | 상처 준 상대를 두고. “원망은 안 해” 형태로 자주 씀 |
| 증오 (jeungo) | 미움만 남은 가장 센 말 | 뉴스·문어체. 일상 대화에 쓰면 과하게 들린다 |
특히 미운 정 (miun jeong) 과의 차이를 알아두면 좋다. 미운 정은 결국 “그래도 정이 들었다”는 쪽으로 착지하는 따뜻한 말이라, 밥상머리에서 웃으며 쓸 수 있다. 애증은 착지하지 않는다. 두 감정이 여전히 팽팽하게 맞서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문화 배경 — 사랑과 미움이 한 글자씩
애증은 한자어다. 사랑 애(愛)와 미워할 증(憎), 정반대 뜻의 글자를 그냥 나란히 붙여 만든 말이다. 이런 조어법은 한국어에 흔하다 — 남녀(男女), 장단(長短), 승패(勝敗)처럼 짝이 되는 두 글자를 붙여 그 전체를 가리킨다. 그래서 애증은 “사랑에서 미움까지의 전 구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어느 한쪽을 고르지 않고 둘 다 껴안은 단어다.
이 감정이 한국 드라마에서 유난히 자주 다뤄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 서사에서 갈등은 대개 남남 사이가 아니라 끊을 수 없는 관계 안에서 벌어진다. 재산을 놓고 다투는 형제, 같은 회사에서 20년을 겨룬 라이벌, 자식을 자기 방식대로 밀어붙이는 어머니. 이들은 미워도 호적과 회사와 명절이 이어져 있어서 관계를 종료할 수가 없다. 미움이 갈 곳이 없으니 사랑 옆에 그대로 쌓인다. 그것이 애증이다. 드라마에서 오래 대립하던 두 인물이 마지막 회에서 말없이 마주 앉는 장면, 그 침묵을 한국 시청자들은 화해가 아니라 애증의 완성으로 읽는다.
일상에서는 훨씬 가볍게도 쓴다. 매일 욕하면서 10년째 응원하는 야구팀, 다이어트 때문에 미워하지만 결국 다시 시키는 야식, 20년을 산 낡은 동네. 한국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애증의”를 붙이며 웃는다. 오래 곁에 두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어에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애증은 그 문장을 두 글자로 압축한 한자어라고 봐도 좋다.
오늘의 퀴즈
다음 중 애증 (aejeung) 을 가장 자연스럽게 쓴 문장은 무엇일까요?
① 오늘 처음 뵌 팀장님과 저는 애증의 관계입니다. ② 20년을 산 이 동네는 나한테 애증의 공간이야. ③ 어제 산 우산이 하루 만에 고장 나서 애증이 생겼어.
정답 보기
정답: ②
애증은 오랜 시간 동안 좋은 기억과 상처가 함께 쌓였을 때 쓰는 말입니다. 20년을 산 동네에는 애정도 지긋지긋함도 함께 있으니 딱 맞습니다.
①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 애증이 쌓일 시간이 없었고, 무엇보다 당사자 앞에서 미움을 선언하는 셈이 되어 무례하게 들립니다. ③은 하루짜리 감정이라 애증이 아니라 그냥 “짜증” 또는 “실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