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gapjil) — 지위가 무례로 바뀌는 순간
갑질
**갑질 (gapjil)**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며 멋대로 구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반찬이 늦게 나왔다고 종업원에게 소리를 지르는 손님, 부하 직원에게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상사, 계약서에 없는 일을 당연한 듯 요구하는 발주처 — 한국 뉴스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면 앵커는 거의 반드시 이 두 글자를 쓴다. 힘이 있는 쪽이 그 힘을 상대에게 무례로 되돌려주는 순간, 한국어는 그것을 갑질이라고 부른다.
이 말의 핵심은 ‘무례’가 아니라 지위 차이다. 똑같이 소리를 질러도 친구가 그러면 그냥 무례한 사람이고, 상사나 손님이 그러면 갑질이 된다. 위아래가 없는 자리에서는 이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갑질을 지적하는 문장에는 늘 두 사람의 관계가 함께 등장한다 — 상사와 부하, 손님과 종업원, 집주인과 세입자, 대기업과 하청업체.
강도도 알아두면 좋다. 폭언이나 폭행처럼 극단적이어야 갑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매일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것, 퇴근한 사람에게 사적인 부탁을 카톡으로 보내는 것, 명절 선물을 은근히 요구하는 것 — 하나하나는 사소해 보여도 거절할 수 없는 관계에서 반복되면 갑질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아무리 무례해도 대등한 사이라면 이 단어는 쓰지 않는다.
문법은 단순하다. 명사이므로 갑질을 하다 (gapjireul hada), 갑질을 당하다 (gapjireul danghada), 갑질이 심하다 (gapjiri simhada) 형태로 쓰고, 사람이나 상황 앞에 붙여 갑질 고객, 갑질 상사처럼 쓰기도 한다. 한 가지만 기억하자 — 이 말은 자기 자신에게 쓰지 않는다. 남을 고발하거나 자기 피해를 호소할 때만 쓰는 말이다.
국립국어원 사전으로 확인하기
갑질 「명사」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멋대로 구는 행동. —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 (krdict.korean.go.kr)
뜻풀이에서 두 가지 행동이 나란히 놓인 점을 보자. ‘무례하게 행동하거나’와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멋대로 구는’. 즉 태도가 무례한 경우와, 태도는 점잖아도 지시가 부당한 경우가 모두 갑질에 들어간다.
사전에 실린 다른 언어 대응어도 함께 보면 뉘앙스가 더 잡힌다.
[en] gapjil — The behavior of a person in a relatively superior position acting rudely toward the other person or telling them to do something like that. [ja] パワハラ。パワーハラスメント — 相対的に優越な地位にある人が相手に無礼な行動をしたり、ああしろこうしろと言いながら勝手に振舞う行動。 [es] dárselas de jefecito — Comportamiento de una persona en una posición relativamente superior que actúa de manera grosera hacia la otra persona o se comporta rebelde pidiendole lo que quiera. [zh] 盛气凌人,霸凌行为,仗势欺人 — 处于相对优越地位的人对他人做出无礼的行为,或颐指气使的行为。 —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 (krdict.korean.go.kr)
영어 쪽은 번역어 없이 gapjil을 그대로 옮겼다. 한 단어로 갈아 끼울 말이 없다는 뜻이다. 일본어는 パワハラ(직장 내 괴롭힘)로 받았는데, 이건 회사 안으로 범위가 좁다 — 한국어 갑질은 손님이 알바생에게 하는 것까지 포함하므로 더 넓다. 스페인어 dárselas de jefecito는 ‘작은 상사 행세를 하다’는 그림이어서 비웃는 느낌이 강하다. 참고로 포르투갈어 대응어는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굳이 옮기면 abuso de poder(권력 남용) 쪽이 가까운데, 이 번역은 사전이 아니라 우리가 붙인 것이다.
사전에 실린 실제 사용 예문도 하나씩 보자.
상사의 갑질. —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 (krdict.korean.go.kr)
가장 전형적인 짝이다. ‘상사의’라는 말이 앞에 붙어 지위 차이를 먼저 못 박는다. 갑질은 이렇게 ‘누구의 갑질’인지가 거의 항상 따라붙는다.
맞아. 요즘 직장 내에서의 갑질 문제가 뉴스에 많이 나오더라. —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 (krdict.korean.go.kr)
친구끼리 반말로 주고받는 대화다. ‘뉴스에 많이 나오더라’는 표현에서 이 말이 사회 문제를 가리키는 공적인 단어로도 쓰인다는 걸 알 수 있다.
내일 회사에서 직장 내 갑질을 근절하기 위한 예방 교육을 한대. —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 (krdict.korean.go.kr)
실제로 한국 회사에 다니면 1년에 한 번쯤 듣게 되는 안내다. ‘근절’, ‘예방 교육’ 같은 딱딱한 단어와 나란히 놓일 만큼 갑질은 이미 공식 문서에 들어간 말이다.
식당에서 손님들이 종업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며 갑질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 (krdict.korean.go.kr)
직장 밖의 갑질이다. 돈을 내는 쪽이 곧 위라고 생각하는 순간 손님도 ‘갑’이 된다. 여기서 ‘무리한 요구’가 갑질의 내용이라는 점을 눈여겨보자.
삼촌이 직장 상사의 갑질 때문에 힘들어 하신다. —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 (krdict.korean.go.kr)
피해자 쪽에서 말하는 문장이다. ‘~때문에 힘들어하다’와 붙는 빈도가 매우 높다. 갑질은 사건이 아니라 지속되는 상태로 이야기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 대화로 보기
상황: 동네 분식집. 늦은 저녁을 먹는 중인데 옆 테이블이 아까부터 시끄럽다.
준경: 저 아저씨 아까부터 계속 저러네. 반찬 늦게 나왔다고 소리를 지르냐. That guy’s been at it for a while now. Yelling just because the side dishes were late?
에밀리: 어우, 딱 갑질이네. 알바생 얼굴 빨개진 거 봐. Ugh, that’s textbook gapjil. Look, the part-timer’s face has gone red.
준경: 진짜. 돈 냈으니까 뭐든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Seriously. He thinks paying for food lets him do anything.
에밀리: 나도 카페 알바할 때 저런 손님한테 갑질 당해 봤어. 그날 집에 가서 울었잖아. I got treated like that too — got gapjil’d by a customer back when I worked at a café. I went home and cried that day.
준경: 아 맞다, 너 홍대에서 일했었지. 사장님한테 말은 했어? Oh right, you worked in Hongdae. Did you tell your boss?
에밀리: 말해도 뭐. “손님이니까 참아” 그러지. 요즘은 좀 나아졌다는데. What would be the point? He’d just say “he’s a customer, put up with it.” They say it’s gotten a bit better these days, though.
이렇게 쓰면 어색합니다
✗ (메뉴를 자꾸 바꾸는 친구에게) 야, 너 진짜 갑질 심하다. ✓ (친구에게) 야, 너 진짜 까다롭다. → 갑질은 지위 차이가 있어야 성립한다. 대등한 친구 사이의 까다로움에는 이 말을 쓰지 않는다. ‘까다롭다’, ‘유별나다’가 맞는 자리다.
✗ (상사 면전에서) 부장님, 그거 갑질 아닌가요? ✓ (동료에게 조용히) 부장님 저건 좀 갑질 아니야? → 갑질은 고발하는 말이다. 당사자 얼굴 앞에서 쓰면 지적이 아니라 선전포고가 된다. 보통 제3자와 이야기할 때, 또는 공식 신고·기사에서 쓴다.
상황별 활용 예문
1. 편의점 알바를 하는 친구가 하소연할 때
저 손님 갑질이 진짜 심해. 카드를 던지듯이 놓고 가. (jeo sonnim gapjiri jinjja simhae. kadeureul deonjideusi noko ga.) 저 손님은 갑질이 정말 심해. 카드를 던지는 것처럼 놓고 가더라.
손님이 욕을 한 것도 아니고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다. 카드를 던지듯 놓는 태도 하나로도 갑질이라는 말이 나온다. ‘갑질이 심하다’는 정도를 말하는 가장 흔한 짝이다.
2. 퇴근길에 동료와 팀장 이야기를 할 때
팀장이 주말에 자기 이삿짐 나르라고 했다니까? 이건 그냥 갑질이야. (timjangi jumare jagi isatjjim nallarago haetdanikka? igeon geunyang gapjiriya.) 팀장이 주말에 자기 이사 짐을 옮기라고 했어. 이건 그냥 갑질이지.
업무와 아무 상관 없는 사적인 일을 시켰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건 그냥 갑질이야’는 판정을 내리는 말투로, 앞의 상황 설명을 한 문장으로 정리할 때 쓴다.
3. 회사 제도를 설명하는 격식 있는 자리에서
저희 회사는 직장 내 갑질을 익명으로 신고할 수 있어요. (jeohui hoesaneun jikjang nae gapjireul ingmyeongeuro singohal su isseoyo.) 우리 회사에는 직장 내 갑질을 익명으로 신고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갑질은 속어가 아니다. 이렇게 존댓말과 공식 제도 설명에도 그대로 들어간다. 신조어지만 이미 공문서와 법 관련 안내문에까지 자리를 잡은 단어다.
존댓말·반말과 비슷한 표현
갑질 자체는 반말·존댓말을 가리지 않는다. **갑질이야 (gapjiriya)**로도, **갑질입니다 (gapjirimnida)**로도 쓴다. 다만 앞서 봤듯 대상이 윗사람일 때 그 앞에서 직접 쓰지 않는다는 제약이 있다. 비슷한 말들과 견주면 자리가 더 분명해진다.
| 표현 | 온도·강도 | 쓰는 자리 |
|---|---|---|
| 갑질 (gapjil) | 강하고 고발하는 느낌 | 뉴스·신고·제3자와의 대화. 당사자 면전에는 안 씀 |
| 진상 (jinsang) | 세고 거칠다. 비속어에 가깝다 | 무례한 손님을 뒤에서 부를 때. 지위 차이가 없어도 씀 |
| 횡포 (hoengpo) | 무겁고 문어적 | 기업·권력의 큰 부당 행위. 기사 제목이나 논평 |
| 꼰대질 (kkondaejil) | 비웃음이 섞인 가벼움 | 나이를 앞세운 훈계·참견. 무례함보다 잔소리 쪽 |
같은 상사를 두고도 부당한 지시를 반복하면 갑질, 옛날 얘기로 훈계만 늘어놓으면 꼰대질이다. 손님이 무례하면 갑질이고, 그 손님을 뒤에서 부를 때는 진상이다. 대기업이 하청업체를 상대로 조직적으로 그러면 신문은 횡포라고 쓴다.
문화 배경 — 계약서의 甲과 乙
한국 계약서는 대개 “갑과 을은 다음과 같이 계약한다”로 시작한다. 갑(甲)과 을(乙)은 십간의 첫째와 둘째, 원래는 순서를 매기는 부호일 뿐이다. 그런데 관행상 돈을 주는 쪽·일을 맡기는 쪽이 갑 자리에, 일을 받는 쪽이 을 자리에 들어갔다. 그래서 ‘갑을 관계’는 대등한 계약 당사자가 아니라 위아래를 뜻하는 말이 됐고, ‘을의 입장’은 곧 약자의 처지를 가리키게 됐다.
여기에 접미사 ‘-질’이 붙어 만들어진 말이 갑질이다. ‘-질’은 어떤 행동을 뜻하는데, 손질·바느질처럼 중립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도둑질처럼 낮잡는 뉘앙스를 만드는 쪽이 훨씬 많다. 즉 갑질은 ‘갑의 행세’를 낮잡아 부른 말이다. 조어 방식 자체에 이미 비난이 들어 있어서, 이 단어를 쓰는 순간 화자는 중립을 포기한 셈이 된다.
이 말이 널리 퍼진 것은 2010년대다. 대기업과 대리점, 본사와 하청업체 사이의 분쟁이 크게 보도되면서 신문 지면에 자주 올랐고, 2019년 7월부터 근로기준법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이 시행되면서 회사마다 예방 교육과 신고 창구가 생겼다. 위에서 본 사전 예문의 ‘예방 교육’이 바로 그 제도다. 요즘은 계약서에서 ‘갑’ ‘을’ 대신 회사명이나 ‘고객사·수행사’로 당사자를 표기하는 곳도 늘었다 — 단어를 바꾸면 관계도 바뀔까 하는 시도인 셈이다.
한국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 구조가 이야기의 뼈대로 쓰이는 걸 자주 만난다. 회사원의 일상을 그린 《미생》(tvN, 2014)은 계약직으로 들어간 주인공이 ‘을’의 자리에서 버티는 과정을 따라가며 큰 공감을 얻었고, 재벌 오너의 횡포를 다루는 드라마는 거의 한 장르가 됐다. 한류 팬이라면 자막에서 이 단어를 만났을 때 화면 속 두 인물의 위아래를 먼저 확인해 보자. 갑질은 대사보다 그 관계에서 먼저 만들어진다.
오늘의 퀴즈
다음 중 갑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은?
① 친구가 약속 시간에 30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② 원룸 집주인이 계약에도 없는 건물 청소를 세입자에게 시켰다. ③ 동생이 말도 없이 내 옷을 입고 나갔다.
정답: ②
집주인과 세입자는 계약상 갑과 을의 관계이고, 계약에 없는 일을 요구했으니 ‘지위 차이 + 부당한 요구’가 모두 갖춰졌다. ①과 ③은 무례하거나 얌체 같은 행동이지만 위아래가 없는 사이여서 갑질이 아니다. 이럴 때는 “예의가 없다”, “매너가 없다” 쪽을 쓴다.
이 글의 단어 뜻풀이와 예문은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krdict.korean.go.kr)에서 가져왔으며, 해당 부분(번역 포함)은 CC BY-SA 2.0 KR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배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