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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지만 —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가장 안전한 네 글자

실례지만

오늘의 표현은 실례지만 (sillyejiman) 이다. 실례지만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조심스러운 질문·부탁을 꺼내기 직전에 “예의에 어긋나는 줄 알지만 양해해 주세요”라고 미리 양해를 구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Excuse me, but…”이 놓이는 자리에 거의 그대로 들어간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학습자가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은 문법이 아니라 “말을 어떻게 시작하지?”다. 길을 물어야 하는데 첫마디가 안 나온다. 카페에서 옆자리가 빈 자리인지 확인하고 싶은데 그냥 앉기도, 묻기도 애매하다. 전화를 받았는데 상대가 누군지 모르겠다. 이 세 상황에 전부 들어가는 말이 실례지만이다. 뜻을 외우는 것보다, 이 말이 상대에게 무엇을 알리는 신호인지를 아는 게 훨씬 중요하다.

실례지만은 한 번에 세 가지를 전한다. 첫째, 우리는 아직 서로 모르는 사이다. 둘째, 지금부터 당신의 시간을 아주 조금 쓰겠다. 셋째, 그래도 괜찮겠느냐. 그래서 이 말에는 규칙이 하나 있다 — 뒤에 반드시 질문이나 부탁이 따라온다. 실례지만 하나만 던져 놓고 끝내면 문장이 끊긴 것처럼 들린다. “실례지만, 여기 자리 있나요?”처럼 뒤가 채워져야 비로소 한 덩어리가 된다.

온도는 정중하지만 무겁지는 않다. 사과처럼 고개를 숙이는 말이 아니라, 문을 두드리는 정도의 예의다.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거리를 정확히 지키는 말이라,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이 네 글자를 붙이는 것만으로 대화의 절반은 안전해진다.

실제 대화로 보기

상황: 토요일 오후, 중고거래로 자전거를 사기로 한 아파트 정문 앞. 약속 시간보다 5분 일찍 도착해 두 사람이 서성이고 있다.

준경: 저분인가? 자전거 끌고 오시는데. Is that them? Someone’s walking a bike over here.

에밀리: 내가 물어볼게. 저기요! …아, 아니네. 그냥 지나가시는 거였어. I’ll ask. Hey there! …Oh, nope. They were just passing by.

준경: 야, 대뜸 저기요 하면 상대도 좀 놀라. 앞에 실례지만 붙이고 시작해 봐. Hey, if you just yell “excuse me,” it startles people. Try starting with “sillyejiman” first.

에밀리: 아 맞다. 그 네 글자 있고 없고 차이가 진짜 크더라. Oh right. Those four syllables really do make a difference.

준경: 저기 또 한 분 오신다. 이번엔 네가 해 봐. Here comes another one. You try this time.

에밀리: 실례지만, 혹시 자전거 때문에 나오셨어요? …봐, 바로 웃으시잖아. Excuse me, are you here about the bike by any chance? …See, they smiled right away.

이렇게 쓰면 어색합니다

✗ (같이 사는 룸메이트에게) 실례지만, 리모컨 좀 줄래? ✓ (같이 사는 룸메이트에게) 야, 리모컨 좀 줘 봐. → 실례지만은 “우리는 아직 사이가 없다”를 표시하는 말이다. 매일 얼굴 보는 사람에게 쓰면 갑자기 선을 긋는 느낌이거나, 화가 나서 비꼬는 농담처럼 들린다. 한국에서 친한 사이에 이 말이 나오면 대개 진심이 아니라 장난이다.

✗ (지하철에서 남의 발을 밟고 나서) 실례지만, 제가 밟았네요. ✓ (지하철에서 남의 발을 밟고 나서) 앗, 죄송합니다. → 실례지만은 앞으로 할 말에 대한 예고이지,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한 사과가 아니다. 이미 끝난 실수에는 “죄송합니다 (joesonghamnida)” 또는 “실례했습니다 (sillyehaetseumnida)“가 맞다. 시제가 다르다고 생각하면 외우기 쉽다 — 실례지만은 앞을 보고, 실례했습니다는 뒤를 본다.

상황별 활용 예문

① 길에서 낯선 사람에게 길을 물을 때

실례지만, 여기서 시청역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요? (sillyejiman, yeogieseo sicheong-yeok garyeomyeon eoneu jjogeuro gaya hanayo?)

가장 교과서적인 자리다. 지도 앱이 있는 시대에도 출구 번호가 헷갈릴 때는 결국 사람에게 묻게 된다. 이때 실례지만 없이 바로 “시청역 어디예요?”라고 하면 급하고 무뚝뚝하게 들린다. 네 글자를 앞에 두면 상대가 걸음을 멈출 시간을 벌어 준다.

② 전화를 받았는데 상대가 누군지 모를 때

실례지만, 어디시라고 전해 드릴까요? (sillyejiman, eodisirago jeonhae deurilkkayo?)

회사에서 전화를 대신 받았을 때 거의 정해진 문장처럼 쓰인다. “누구세요?”는 상대를 추궁하는 느낌이 나지만, 실례지만을 붙이면 “묻는 게 제 실례인 줄 압니다만 업무상 여쭙습니다”라는 태도가 된다. 사람 이름을 물을 때는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sillyejiman, seongham-i eotteoke doeseyo?)”가 짝처럼 따라온다.

③ 사적인 것을 묻기 직전, 미리 양해를 구할 때

실례지만, 실례가 안 된다면 나이를 여쭤봐도 될까요? (sillyejiman, sillyega an doendamyeon naireul yeojwobwado doelkkayo?)

한국어에서 나이는 말투를 정하는 기준이라 자주 오가지만, 그래도 초면에 묻기는 조심스러운 정보다. 이럴 때 실례지만은 “이 질문이 무례할 수 있다는 걸 나도 안다”는 자백에 가깝다. 이 한마디가 붙으면 상대가 대답을 피해도 서로 민망하지 않다. 학습자에게 특히 유용한 쓰임이다 — 물어도 되는지 확신이 안 서는 질문 앞에 붙이면, 질문의 위험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존댓말·반말과 비슷한 표현

표현온도·강도쓰는 자리
실례지만 (sillyejiman)정중하고 격식 있음. 거리를 지킨다모르는 사람·손윗사람에게 말 걸기 전. 질문·부탁이 뒤따를 때
저기요 (jeogiyo)중립. 톤에 따라 무뚝뚝하게도 들림식당에서 종업원 부르기, 길에서 사람 세우기
죄송하지만 (joesonghajiman)미안함이 섞임. 실례지만보다 무겁다거절할 때, 부담스러운 부탁을 할 때
잠시만요 (jamsimanyo)급하고 실용적사람 사이를 지나갈 때, 잠깐 멈춰 달라고 할 때
미안한데 (mianhande)반말. 편하고 가볍다친구·동생에게 부탁을 꺼낼 때

표에서 눈여겨볼 것은 실례지만에는 반말 짝이 없다는 점이다. “실례지만”을 억지로 반말로 바꿔 봐야 쓸 자리가 없다. 애초에 이 말은 거리가 있는 사이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에서 같은 자리를 채우는 말은 “미안한데” 또는 “야, 저기”다. 반대로 더 격식을 올리고 싶으면 “실례지만” 대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sillyega doeji anneundamyeon)“을 쓴다.

한 가지 더. 실례합니다 (sillyehamnida) 는 형제 같은 표현이지만 자리가 다르다. 실례합니다는 남의 공간에 들어가거나 사람 사이를 지나갈 때, 즉 몸이 움직일 때 쓴다. 실례지만은 말이 움직일 때 쓴다. 남의 사무실 문을 열며 “실례합니다”, 그러고 나서 안에 있는 사람에게 “실례지만, 김 과장님 자리에 계실까요?” — 이렇게 이어지면 완벽하다.

문화 배경 — 예를 잃는다는 말

실례(失禮)는 한자어다. 잃을 실(失)과 예도 례(禮), 그대로 “예를 잃음”이다. 여기에 앞말을 인정하면서 뒷말로 넘어가는 연결 어미 -지만이 붙었다. 그러니 실례지만을 글자 그대로 풀면 “이것이 예를 잃는 일인 줄 압니다만”이 된다. 자기가 지금 규칙을 살짝 어기고 있다는 걸 먼저 인정하고 들어가는 구조다. 한국어의 정중함이 종종 이런 모양을 띤다 — 부탁을 부드럽게 만드는 게 아니라, 부탁이 부담이라는 사실을 먼저 말해 버린다.

드라마에서 이 말이 나오는 자리도 정해져 있다. 형사가 낯선 집 초인종을 누르고 신분증을 꺼내며 말을 시작할 때, 기자가 인터뷰를 청할 때, 로맨스물에서 남녀 주인공이 아직 서로의 이름도 모르는 첫 장면에서. 그래서 한국 시청자에게 이 네 글자는 “이제부터 모르는 사람 사이의 대화가 시작된다”는 신호처럼 들린다. 반대로 두 사람이 가까워지고 나면 이 말은 조용히 사라진다. 실례지만이 안 나오기 시작하는 순간이 관계가 바뀐 순간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실생활에서는 훨씬 담백하게 쓰인다. 편의점, 병원 대기실, 관공서 창구, 중고거래 약속 장소. 한국에 사는 외국인 학습자에게 이 말이 특히 든든한 이유가 있다. 발음이 어렵지 않고, 뒤에 어떤 문장이 오든 어색해지지 않으며, 설령 뒷말의 문법이 조금 흔들려도 앞의 실례지만이 태도를 먼저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한국어가 아직 서툴다면, 이 네 글자는 문법 실수를 덮어 주는 가장 값싼 보험이다.

오늘의 퀴즈

다음 중 실례지만을 쓰기에 가장 알맞은 상황은?

① 지하철에서 옆 사람의 발을 밟은 직후 ② 10년 된 친구에게 볼펜을 빌릴 때 ③ 처음 보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볼 때 ④ 지각한 것을 상사에게 사과할 때

정답: ③

①과 ④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사과라서 “죄송합니다”가 맞다. 실례지만은 앞으로 할 말을 예고하는 말이지 사과가 아니다. ②는 이미 충분히 가까운 사이라 이 말을 쓰면 비꼬는 농담처럼 들린다. ③처럼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이나 질문을 꺼내기 직전 — 그 자리가 실례지만의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