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Euljiro) — 인쇄기 소리와 노가리 골목 사이, 서울에서 가장 이상한 길
을지로
**을지로 (Euljiro)**는 서울 중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큰길의 이름이자, 그 길을 따라 늘어선 인쇄소·조명 상가·공구 가게와 골목 안 오래된 술집까지 통틀어 부르는 동네 이름이다. 지도 위에서 을지로는 을지로입구에서 을지로7가까지 곧게 뻗은 도로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 을지로에서 보자 (Euljiro-eseo boja) 하고 말할 때, 그 말은 도로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저녁 여섯 시 반, 인쇄소 셔터가 반쯤 내려간 골목에 플라스틱 의자를 펴고 앉는 그 자리를 가리킨다.
지명은 보통 외우면 끝나는 단어다. 그런데 을지로는 외워도 절반만 아는 말이 된다. 이 이름 하나 안에 서울에서 가장 낡은 제조업 골목과 요즘 가장 붐비는 술집이 같은 주소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낮에는 작업복을 입은 사장님들이 손수레로 인쇄 용지를 밀고 다니고, 밤이 되면 같은 골목에 이십 대들이 줄을 선다. 이 두 장면이 겹쳐 있는 곳이 을지로다.
을지로는 세 가지 크기로 쓰인다. 가장 작게는 도로 그 자체다. 서울시청과 명동 사이에서 시작해 동대문 쪽으로 이어지는 왕복 도로, 그러니까 택시 기사님께 말하는 을지로다. 그다음은 상권으로서의 을지로다. 조명이 필요하면 을지로, 명함이나 전단을 인쇄해야 하면 을지로, 공구나 타일을 사야 해도 을지로. 서울 사람들은 물건 이름을 대는 대신 동네 이름 하나로 목적지를 말한다. 마지막은 분위기를 가리키는 을지로다. **을지로 감성 (Euljiro gamseong)**이라는 말이 그렇다. 새것처럼 꾸미지 않고 낡은 간판과 초록색 철문을 그대로 둔 채 그 안에서 술을 파는, 조금 어둡고 조금 촌스러운 멋을 뜻한다.
발음은 표기 그대로 세 음절, [을지로]이다. 지하철역 이름은 을지로 뒤에 위치를 붙여 을지로입구역 (Euljiro-ipgu-yeok), 을지로3가역 (Euljiro sam-ga-yeok), 을지로4가역 (Euljiro sa-ga-yeok) 세 개가 있다. 여기서 ‘가(街)‘는 긴 길을 토막으로 나눠 세는 단위라서, 1가에서 7가로 갈수록 동쪽으로 이동한다.
실제 대화로 보기
상황: 금요일 저녁 일곱 시. 지하철역 출구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에밀리가 보이지 않는다. 준경이 전화를 건다.
준경: 여보세요, 너 어디야? 나 출구 앞에 벌써 와 있는데. Hello? Where are you? I’m already at the exit.
에밀리: 나 을지로입구역 5번 출구. 앞에 백화점 있어. I’m at exit 5 of Euljiro 1-ga Station. There’s a department store in front of me.
준경: 아이고, 거기 아니야. 을지로3가! 두 정거장 더 와야 돼. Oh no, that’s not it. Euljiro 3-ga! You’ve got two more stops to go.
에밀리: 진짜? 난 을지로가 그냥 한 군데인 줄 알았지. Seriously? I thought Euljiro was just one place.
준경: 길이 엄청 길어. 1가부터 7가까지 있어. 노가리 골목은 3가야. It’s a really long street. It runs from 1-ga to 7-ga. The nogari alley is at 3-ga.
에밀리: 알았어, 두 정거장이면 금방이지. 딱 5분만 기다려! Got it, two stops is nothing. Give me exactly five minutes!
이렇게 쓰면 어색합니다
을지로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지명이라 무례해질 일은 없다. 대신 학습자가 거의 예외 없이 걸려 넘어지는 오해가 둘 있다.
✗ 우리 이따 을지로역에서 만나자. ✓ 우리 이따 을지로3가역에서 만나자. → ‘을지로역’이라는 역은 없다. 을지로입구·을지로3가·을지로4가 세 역이 한 정거장 간격으로 붙어 있어서, 을지로라고만 말하면 상대가 어느 역인지 알 수 없다. 실제로 약속이 어긋나는 가장 흔한 이유다.
✗ (40년 일한 인쇄소 사장님께) 사장님, 여기가 그 유명한 힙지로죠? ✓ (또래 친구에게) 야, 여기가 그 힙지로라는 데야. → **힙지로 (Hipjiro)**는 힙하다 + 을지로를 붙인 유행어로, 이 동네를 놀러 오는 쪽에서 만든 말이다. 매일 일하는 분 앞에서 쓰면 남의 일터를 구경거리로 부르는 느낌이 될 수 있다. 어른께는 그냥 을지로라고 하는 편이 안전하다.
상황별 활용 예문
1. 약속 장소를 정할 때 — 출구 번호까지 말해야 헤매지 않는다.
을지로3가역 12번 출구에서 일곱 시에 봐. (Euljiro sam-ga-yeok sibi-beon chulgu-eseo ilgop-si-e bwa.) — 을지로3가역은 출구가 많고 골목이 사방으로 갈라져서, 한국 사람끼리도 역 이름만으로는 약속을 잡지 않는다.
2. 물건을 사러 갈 때 — 가게 이름 대신 동네 이름을 댄다.
조명은 을지로 가면 다 있어요. (Jomyeong-eun Euljiro gamyeon da isseoyo.) — 집을 고치거나 가게를 차리는 사람에게 한국인이 자주 하는 조언이다. 특정 매장이 아니라 상가 골목 전체를 하나의 가게처럼 말하는 방식이다.
3. 취향을 말할 때 — 지명이 형용사처럼 쓰인다.
요즘은 을지로 감성이 좋더라. 새 건물보다 저런 데가 편해. (Yojeum-eun Euljiro gamseong-i jotdeora. Sae geonmul-boda jeoreon de-ga pyeonhae.) — 인테리어, 사진, 카페 취향을 말할 때 쓴다. 낡은 것을 굳이 감추지 않은 멋을 칭찬하는 표현이다.
존댓말·반말과 비슷한 표현
지명 자체에는 높임이 없다. 높임은 뒤에 붙는 서술어가 진다. 친구에게는 을지로 가자 (Euljiro gaja), 손윗사람이나 거래처에는 **을지로에서 뵐까요 (Euljiro-eseo boelkkayo)**처럼 바뀐다. 이름 부분은 그대로 두고 문장 끝만 갈아 끼우면 된다.
| 표현 | 온도·강도 | 쓰는 자리 |
|---|---|---|
| 을지로 (Euljiro) | 중립 | 어디서나. 어른께도, 문서에도 |
| 힙지로 (Hipjiro) | 가볍고 신남, 유행어 | 또래·SNS. 상인분들 앞에서는 피함 |
| 을지로3가 (Euljiro sam-ga) | 중립, 아주 구체적 | 약속을 잡을 때. 실수가 없다 |
| 충무로 (Chungmuro) | 중립 | 을지로 남쪽 옆길. 인쇄·영화의 거리 |
문화 배경 — 장군의 이름을 붙인 길
을지로라는 이름은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 (Euljimundeok)**에게서 왔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서울은 일제강점기에 붙었던 일본식 거리 이름을 한국 인물의 이름으로 바꿨다. 이때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딴 충무로, 학자 이황의 호를 딴 퇴계로, 승려 원효의 이름을 딴 원효로가 함께 생겼다. 을지로도 그 줄에 있다. 그러니까 이 길 이름은 술집 골목이기 이전에, 나라를 되찾은 해에 새로 쓴 이름이다.
이름은 오래됐지만 지금의 을지로를 만든 건 그 뒤의 손기술이다. 청계천 남쪽 이 일대에 인쇄소와 철공소, 조명·타일·공구 도매상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한 골목에서 종이를 자르고, 옆 골목에서 간판을 만들고, 그 옆에서 배선을 사는 식으로 작은 공장 하나가 동네 전체에 흩어져 있는 구조다. 낮의 을지로 소리는 인쇄기와 절단기 소리다.
밤에는 소리가 바뀐다. 을지로3가 뒷골목에는 말린 명태 새끼인 **노가리 (nogari)**를 구워 맥주와 함께 파는 오래된 호프집들이 모여 있다. 저녁이 되면 가게 안이 다 차서 골목 바닥까지 플라스틱 탁자가 나온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이 낡은 건물 2층, 3층에 간판도 없는 작은 바와 카페가 들어서면서 힙지로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국 드라마와 예능이 서울의 밤 골목을 찍을 때 이 근처를 자주 쓰는 것도 그래서다. 새로 지은 거리에서는 나오지 않는 그림이 여기에 있다.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에게 을지로가 좋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 동네 가게에서는 표준어보다 일하는 말이 먼저 들린다. 몇 개 드릴까요, 이거 언제 돼요, 저기 안쪽으로 들어가세요 같은 짧은 문장이 계속 오간다. 교과서 밖의 한국어를 귀로 익히기에 이만한 교실이 드물다.
오늘의 퀴즈
친구가 노가리 골목에서 보자고 했다. 약속 장소로 정확한 것은?
① 을지로역 8번 출구 ② 을지로3가역 4번 출구 ③ 을지로 앞
정답: ②
을지로역이라는 역은 존재하지 않으니 ①은 애초에 만날 수 없는 장소다. ③은 길이 4킬로미터쯤 되기 때문에 아무 데도 가리키지 못한다. 을지로에서 약속을 잡을 때는 반드시 몇 가인지, 그리고 몇 번 출구인지까지 말해 주는 것이 한국식 배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