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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jokbo) — 가문의 계보에서 시험 자료까지, 한국 학생들의 은어

족보

**족보 (jokbo)**는 한 가문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기록한 책을 뜻하는 말이면서,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는 선배에게서 대물림되는 시험 기출·정리 자료를 가리키는 은어라는 뜻이다. 사전을 펴면 조선시대 양반 집안의 두꺼운 책이 나오는데, 대학 단톡방을 열면 시험 2주 전에 이런 말이 올라온다. ‘야, 이 과목 족보 도는 거 있어?’ 같은 단어인데 하나는 수백 년 된 종이 뭉치를 가리키고, 하나는 카톡으로 오가는 PDF 파일을 가리킨다.

한국 드라마나 예능을 보다 보면 이 단어가 전혀 다른 두 얼굴로 나온다. 명절 밥상에서 어른들이 ‘족보가 꼬였다’며 웃을 때는 집안 서열 이야기이고, 캠퍼스 장면에서 학생이 ‘족보 좀 구해 줘’라고 할 때는 시험 이야기다. 학습자가 헷갈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오늘은 이 두 얼굴을 한 번에 정리한다.

먼저 뉘앙스. 본래 뜻인 ‘가문의 계보’는 진지하고 무거운 말이다. 조상, 혈통, 항렬 같은 단어와 함께 다니고, 함부로 농담에 얹지 않는다. 반면 학생 은어로 쓰이는 족보는 가볍고 은밀하다. 공식 자리에서 쓸 말이 아니라 또래끼리 주고받는 말이고, ‘남들은 다 가진 걸 나만 못 구했다’는 초조함이 살짝 묻어 있다. 여기서 갈라져 나온 관용 표현도 둘 있다. **족보가 꼬이다 (jokbo-ga kkoida)**는 나이와 서열이 어긋나 호칭이 엉킨 상황을 말하고, **족보가 없다 (jokbo-ga eopda)**는 근본이나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뜻이다. 뒤엣것은 사람에게 쓰면 아주 심한 말이 되니 조심해야 한다.

국립국어원 사전으로 확인하기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은 족보를 명사로 싣고 두 가지 뜻을 나눠 놓았다. 은어 쪽은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았고, 사전이 기록한 것은 본래 뜻이다.

족보 「명사」

  1. 한 가문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기록한 책. [en] genealogy — A book where a family’s lineage and blood lines are recorded. [ja] ぞくふ【族譜】。けいず【系図】。かふ【家譜】 — 一族の系統と血統関係を書き記した本。 [es] árbol genealógico, genograma — Libro que registra la relación sanguínea y el linaje de una familia. [zh] 族谱,家谱,系谱 — 记载一个家族的世系及血统关系的书。 —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 (krdict.korean.go.kr)

족보 「명사」 2. 한 가문의 계통과 혈통 관계. [en] lineage — The lineage and blood lines of a family. [ja] ぞくふ【族譜】。けいふ【系譜】。かふ【家譜】。ちすじ【血筋】 — 一族の系統と血統関係。 [es] relación familiar — Relación sanguínea y linaje de una familia. [zh] 族谱,家谱,系谱 — 一个家族的世系及血统关系。 —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 (krdict.korean.go.kr)

1번은 ‘책’이고 2번은 ‘관계’ 자체다. ‘족보를 펼치다’처럼 물건으로 다루면 1번, ‘두 집안은 족보가 같다’처럼 관계를 말하면 2번이다.

포르투갈어 번역은 사전에 실려 있지 않아, 아래는 저희가 직접 옮긴 것임을 밝힙니다. — [pt] genealogia / linhagem — Livro que registra a linhagem e os laços de sangue de uma família.

사전이 함께 싣고 있는 실제 사용 예문도 보자. 아래 인용은 모두 사전 원문 그대로다.

족보 등재. —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 (krdict.korean.go.kr)

족보 등재 (jokbo deungjae), 즉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다. 예전에는 집안의 새 아이가 태어나거나 혼인이 이루어지면 이름을 올렸다. 명사끼리 붙은 짧은 표현이라 신문 기사나 안내문에 잘 쓰인다.

박 씨네 족보를 보니까 양반 집안인 것 같던데. —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 (krdict.korean.go.kr)

박 씨네 족보를 보니까 양반 집안인 것 같던데 (Bak ssine jokbo-reul bonikka yangban jibin-in geot gatdeonde). 동네 사람끼리 남의 집안을 두고 수군거리는 말투다. 어미 ‘-던데’가 ‘내가 보기엔 그렇더라’는 전언의 느낌을 만든다. 이 문장에서 족보는 실제로 펼쳐 본 ‘책’이다.

조선 후기에는 철저히 부계 중심으로 족보를 기록했다. —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 (krdict.korean.go.kr)

조선 후기에는 철저히 부계 중심으로 족보를 기록했다 (Joseon hugi-eneun cheoljeohi bugye jungsim-euro jokbo-reul girokaetda). 역사 수업이나 다큐멘터리에서 나올 법한 설명문이다. 조선 전기만 해도 딸과 사위가 함께 올랐지만 후기로 갈수록 아들 중심으로 좁아졌다는, 한국사에서 자주 다루는 사실이다.

족보를 보니 우리 집안과 옆집 아저씨네 집안은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였다. —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 (krdict.korean.go.kr)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 (gateun josang-eseo gallajyeo naon bunpa). 이건 2번 뜻에 가깝다. 옆집 아저씨와 알고 보니 먼 친척이더라는, 한국에서 실제로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족보에 오른 장인들은 나라에 세금을 바쳐야 했다. —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 (krdict.korean.go.kr)

여기서는 **족보에 오르다 (jokbo-e oreuda)**가 ‘명부에 등록되다’라는 행정적 의미로 확장돼 쓰였다. 이름이 장부에 오르면 의무도 따라붙는다는 맥락이다.

실제 대화로 보기

상황: 야간 대학원 강의가 끝난 텅 빈 강의실. 중간고사가 2주 앞이다. 에밀리는 이 학과에 이번 학기에 들어왔다.

준경: 에밀리, 이 과목 시험 처음이지? 혹시 족보 구했어? Emily, this is your first exam in this class, right? Did you get hold of a jokbo?

에밀리: 족보? 나 우리 시댁 족보밖에 몰라. 그게 시험이랑 무슨 상관이야? Jokbo? The only jokbo I know is my in-laws’ family register. What does that have to do with an exam?

준경: 아 그거 말고. 선배들이 물려주는 기출문제 모음 있잖아. 이 교수님 문제 절반은 작년이랑 똑같아. Ah, not that one. The collection of past exam questions the seniors pass down. Half of this professor’s questions are the same as last year’s.

에밀리: 헐, 그런 게 돌아다녀? 나만 몰랐네, 진짜. Whoa, that’s going around? I was seriously the only one who didn’t know.

준경: 내가 이따 파일 보내 줄게. 근데 족보만 믿다가 문제 싹 바뀌면 큰일 나. I’ll send you the file later. But if you trust only the jokbo and the questions all change, you’re done for.

에밀리: 알지. 보험이지 뭐. 고마워, 오빠! I know. It’s just insurance. Thanks, oppa!

이렇게 쓰면 어색합니다

✗ (교수님께) 교수님, 이번 시험 족보 좀 주실 수 있을까요? ✓ (선배에게) 선배, 혹시 이 과목 족보 있으면 좀 주세요. → 은어 족보는 학생들끼리 조용히 돌리는 자료를 가리킨다. 출제자인 교수에게 달라고 하면 사실상 문제를 미리 알려 달라는 부탁이 된다. 교수에게는 ‘지난 학기 기출문제를 참고해도 될까요?‘가 맞다.

✗ (친구 집안 이야기를 하다가) 너희 집은 족보도 없나 보다. ✓ (강의 이야기를 하다가) 이 수업은 족보가 없어서 다들 맨땅에 헤딩이야. → ‘족보가 없다’가 사람이나 집안에 붙으면 ‘근본이 없다’는 아주 심한 모욕이 된다. 자료나 물건에 붙을 때만 ‘참고할 게 없다’는 가벼운 뜻으로 읽힌다.

상황별 활용 예문

1. 시험 사흘 전, 학과 단톡방

오랜 유학 생활 끝에 한국 대학에 들어간 학습자가 가장 먼저 마주치는 장면이다. 모두가 조용히 자료를 주고받는데 나만 아무것도 없다.

야, 이 과목 족보 도는 거 있어? 나 하나도 못 구했어. (ya, i gwamok jokbo doneun geo isseo? na hanado mot guhaesseo.) Hey, is there a jokbo going around for this class? I couldn’t get a single one.

‘돌다 (dolda)‘가 핵심이다. 손에서 손으로 돌아다닌다는 뜻이라, 이 자료의 은밀한 성격을 한 글자로 보여 준다.

2. 추석 저녁, 큰집 거실

나보다 열 살 어린 아이가 항렬로는 위여서 내가 ‘아저씨’라고 불러야 하는 상황. 한국 명절에 매년 벌어지는 일이다.

쟤가 나보다 어린데 나더러 조카래. 족보가 완전히 꼬였네. (jyaega nabodadi eorinde nadeoreo jokarae. jokbo-ga wanjeonhi kkoyeonne.) He’s younger than me but says I’m his nephew. The family lines are totally tangled.

족보가 꼬이다는 화를 내는 말이 아니라 웃으며 하는 말이다. 어색한 호칭을 농담으로 넘길 때 쓴다.

3. 회사 첫 출근 날, 사수의 자리

요즘은 은어가 캠퍼스 밖으로도 나왔다. 인수인계 문서를 농담 삼아 이렇게 부른다.

우리 팀은 업무 족보가 잘 정리돼 있어서 신입도 금방 따라와요. (uri timeun eommu jokbo-ga jal jeongnidwae isseoseo sinipdo geumbang ttarawayo.) Our team’s work jokbo is well organized, so new hires catch up fast.

같은 팀 안에서 편하게 하는 말이다. 사외 보고서나 공식 문서에는 ‘업무 매뉴얼’이라고 쓴다.

존댓말·반말과 비슷한 표현

족보는 명사라서 그 자체에는 높낮이가 없다. 높임은 뒤에 붙는 서술어가 만든다. 친구에게는 ‘족보 있어? (jokbo isseo?)’, 선배에게는 ‘혹시 족보 있으세요? (hoksi jokbo isseuseyo?)’가 된다. 다만 문법을 아무리 높여도 단어 자체가 은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교수, 회사 상사, 공식 문서 앞에서는 아예 다른 단어로 갈아타는 편이 안전하다.

표현온도·강도쓰는 자리
족보 (jokbo)은어. 친근하고 은밀함학생끼리, 단톡방. 교수·공식 문서엔 안 씀
기출문제 (gichul munje)중립·공식어디서나. 교수·학원·공지문
정리본 (jeongribon)중립·실용적필기를 요약한 자료. 출처를 따지지 않음
매뉴얼 (maenyueol)딱딱하고 공식적회사 문서, 사외 보고

표에서 보듯 족보기출문제는 가리키는 물건이 겹칠 때가 많지만 자리가 다르다. 같은 PDF를 두고 친구에게는 ‘족보’, 교수에게는 ‘기출문제’라고 부르는 것이 한국 학생들의 감각이다.

문화 배경 — 대물림이라는 한 글자

왜 하필 시험 자료에 ‘가문의 책’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두 물건이 공유하는 성질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대물림 (daemullim), 즉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는 점이다. 조상에서 자손으로 이어지는 것이 본래의 족보라면, 선배에서 후배로 이어지는 것이 캠퍼스의 족보다. 한 학번 위가 다음 학번에게 넘기고, 그 학번이 또 다음에게 넘긴다. 이름만 빌려 온 것이 아니라 작동 방식까지 빌려 온 셈이다.

본래의 족보 문화도 알아 두면 좋다. 조선시대 양반 집안은 몇 대에 걸친 이름을 한 권에 정리해 보관했고, 사전 예문에도 나오듯 조선 후기로 갈수록 아버지 쪽 혈통 중심으로 좁아졌다. 여기서 나온 것이 **항렬 (hangnyeol)**이다. 같은 세대끼리 이름에 같은 글자를 넣어 서열을 표시하는 방식인데, 이 때문에 나이와 항렬이 어긋나는 일이 생긴다. 앞의 예문에서 열 살 어린 아이가 아저씨가 되는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명절마다 이 주제로 웃음이 터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 드라마에서도 두 얼굴이 그대로 나온다. 가족 드라마에서는 어른들이 두꺼운 책을 펼쳐 놓고 누가 몇 대손인지 따지는 장면이 나오고, 캠퍼스나 입시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학생들이 시험 전날 자료를 구하려고 뛰어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인터넷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나이와 서열 관계를 뒤엉키게 만드는 사람을 두고 ‘족보 브레이커’라 부르기도 한다. 신조어라 사전에는 없지만 커뮤니티에서는 자주 보인다.

정리하면 이렇다. 무거운 뜻과 가벼운 뜻이 한 단어 안에 같이 산다. 어느 쪽인지는 언제나 함께 나온 단어가 알려 준다. 조상·집안·항렬이 옆에 있으면 책이고, 시험·교수님·기출이 옆에 있으면 파일이다.

오늘의 퀴즈

다음 중 족보를 어색하게 쓴 문장은 무엇일까요?

  1. 시험 일주일 남았는데 아직 족보를 못 구했어.
  2. 교수님, 이번 시험 족보 좀 미리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족보를 보니 우리 집안은 원래 경상도에서 올라왔더라.
정답 보기

정답은 2번입니다. 족보는 학생들끼리 주고받는 은어라서, 문제를 내는 사람인 교수에게 달라고 하면 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 달라는 부탁으로 들립니다. 존댓말을 아무리 정중하게 붙여도 이 어색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지난 학기 기출문제를 참고해도 괜찮을까요?‘라고 바꿔야 합니다. 1번은 학생끼리 쓰는 은어 용법으로 자연스럽고, 3번은 사전에 실린 본래 뜻 그대로입니다.

이 글의 단어 뜻풀이와 예문은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krdict.korean.go.kr)에서 가져왔으며, 해당 부분(번역 포함)은 CC BY-SA 2.0 KR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배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