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붙 (bokpput) — '복사해서 붙여넣기', 그리고 '성의 없다'는 말
한국 친구에게 카톡으로 계좌번호를 물어보면 십중팔구 이런 답이 돌아온다. “잠깐만, 복붙해서 보낼게.”
복붙
**복붙 (bokpput)**은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줄인 말로, 어떤 내용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옮겨 붙인다는 뜻이다. 컴퓨터와 휴대폰에서 매일 수십 번씩 하는 그 동작 — Ctrl+C 로 복사하고 Ctrl+V 로 붙이는 일 — 을 두 글자로 줄여 부르는 말이다. 사전에 오른 표준어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거나 학교를 다니거나 그냥 단톡방에 있기만 해도 하루에 한 번은 듣게 되는 말이다.
쓰임은 크게 두 갈래다. 첫째는 말 그대로 화면 위의 동작이다. 링크를, 주소를, 계좌번호를, 남이 보낸 공지를 그대로 옮길 때 쓴다. 이때 복붙은 아무 감정도 없는 중립적인 말이다. 오히려 “직접 치지 말고 복붙해”라는 말에는 ‘틀리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들어 있다. 한국어 주소나 열여섯 자리 계좌번호를 손으로 옮겨 치다가 한 글자 틀리는 사고를, 한국 사람들은 이미 여러 번 겪어 봤다.
둘째는 비유다. 남이 만든 것을, 혹은 예전에 자기가 만든 것을 손 하나 안 대고 그대로 가져다 쓴 결과물을 두고 복붙이라고 한다. “이 보고서 작년 거 복붙했네”라고 하면 칭찬이 아니라 지적이다. 여기서 이 말의 온도가 확 바뀐다. 동작을 가리킬 때는 편리함의 말이지만, 결과물을 가리키면 ‘성의 없음’을 지적하는 말이 된다. 한 걸음 더 나가면 표절을 에둘러 말하는 표현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갈라져 나온 셋째 쓰임도 있다. 두 사람이나 두 물건이 지나치게 똑같이 생겼을 때 “완전 복붙이다”라고 한다. 부모와 자식의 얼굴, 유행을 따라 똑같이 꾸민 카페 인테리어 같은 것들이다. 이건 비난이 아니라 감탄에 가깝다.
동사로 쓸 때는 뒤에 ‘하다’를 붙여 복붙하다 (bokpputada) 가 된다. 발음은 [복뿓], ‘붙’의 받침 ㅌ 때문에 뒤에 모음이 오면 [복뿌타다]처럼 소리 난다.
실제 대화로 보기
상황: 출입국·외국인청 대기실. 번호표는 아직 스무 명이나 남았고, 에밀리가 휴대폰으로 체류 기간 연장 신청서를 쓰고 있다. 준경이 옆자리에서 화면을 들여다본다.
준경: 주소는 손으로 치지 마. 등본에 있는 거 복붙해. Don’t type the address by hand. Just copy-paste it from your residence certificate.
에밀리: 했는데 띄어쓰기가 이상하게 붙어왔어. 앞에 공백이 두 칸이야. I did, but the spacing came out weird. There are two blank spaces in front.
준경: 아, 그거 원래 그래. 메모장에 한 번 붙였다가 다시 가져와. Ah, that always happens. Paste it into a memo app first, then bring it back over.
에밀리: 아 진짜 귀찮아. 사유서는 그냥 작년 거 복붙하면 안 돼? Ugh, so annoying. Can’t I just copy-paste last year’s statement of reasons?
준경: 하지 마. 날짜까지 작년 거 그대로면 바로 티 나. Don’t. If even the date is still last year’s, they’ll spot it right away.
에밀리: 알았어, 알았어. 앞부분만 살리고 다시 쓸게. Okay, okay. I’ll keep the opening and rewrite the rest.
같은 대화 안에서 복붙이 두 번 나오는데 온도가 다르다. 준경이 먼저 쓴 ‘복붙해’는 “실수하지 말고 편하게 가져와”라는 뜻이고, 에밀리가 쓴 ‘복붙하면 안 돼?‘는 “대충 넘어가면 안 될까?”라는 뜻이다. 그래서 준경이 바로 “하지 마”라고 막는다.
이렇게 쓰면 어색합니다
✗ (팀장에게 보고하며) 지난 분기 자료는 그냥 복붙했습니다. ✓ (팀장에게 보고하며) 지난 분기 자료를 그대로 옮겨 왔습니다. → ‘-습니다’를 붙여도 복붙에 밴 ‘손 안 대고 대충’이라는 뉘앙스는 지워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을 설명하면서 쓰면 성의 없이 처리했다는 자백처럼 들린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대로 옮기다’, ‘동일하게 적용하다’ 쪽이 안전하다.
✗ (처음 보는 사람 글에 댓글로) 이 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복붙이죠? ✓ 혹시 다른 글과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한번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친한 사이의 농담이 아니라면 복붙은 표절 지적이 된다. 가볍게 던진 말이라도 받는 사람에게는 공개적인 비난으로 꽂힌다.
상황별 활용 예문
1. 단톡방에 공지를 옮길 때 — 회사 게시판에 올라온 공지를 팀 단톡방에 그대로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는 상황이다. 여기서는 아무 부정적 뉘앙스가 없다.
공지 복붙해서 단톡방에 올려 줘. (gongji bokpputhaeseo dantokbange ollyeo jwo) Copy-paste the notice and post it in the group chat.
2. 자기소개서를 봐 줄 때 — 취업 준비 중인 친구의 자기소개서를 읽다가, 회사 이름만 바꾸고 나머지는 예전 것을 그대로 쓴 흔적을 발견한 상황이다. ‘티 나다(눈에 띄다)‘와 짝을 이루어 자주 쓴다.
이 자소서, 다른 회사 거 복붙한 티 난다. (i jasoseo, dareun hoesa geo bokpputhan ti nanda) You can tell this cover letter was copy-pasted from another company’s version.
3. 닮은 얼굴을 보고 —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 아버지를 처음 뵌 상황. 이때의 복붙은 감탄이고 칭찬에 가깝다.
너 아버님이랑 얼굴 완전 복붙이네. (neo abeonimirang eolgul wanjeon bokpputine) You and your dad look like total copy-paste jobs.
존댓말·반말과 비슷한 표현
복붙은 명사라서 그 자체에는 높임이 없다. 뒤에 무엇을 붙이느냐로 온도가 결정된다. 반말은 ‘복붙해’, 두루높임은 ‘복붙했어요’, 격식체는 ‘복붙했습니다’가 되지만 — 앞에서 본 대로 격식체를 붙인다고 이 말이 격식 있는 자리에 어울리게 되지는 않는다. 형태만 높이고 단어는 그대로라 오히려 어색해진다. 손윗사람 앞이나 문서에서는 단어 자체를 바꾸는 편이 낫다.
| 표현 | 온도·강도 | 쓰는 자리 |
|---|---|---|
| 복붙 (bokpput) | 가볍고 빠름, 구어 | 또래·메신저·팀 내 잡담. 보고서나 공문에는 안 씀 |
| 복사해서 붙여넣기 (boksahaeseo butyeoneokgi) | 중립·설명체 | 매뉴얼·공지·손윗사람에게 설명할 때 |
| 베끼다 (bekkida) | 부정적, 직접적인 비난 | 남의 것을 몰래 가져왔을 때. 농담으로도 무겁다 |
| 판박이 (panbagi) | 친근한 감탄 | 외모·성격이 똑같을 때. 사물에도 씀 |
| 붕어빵 (bung-eoppang) | 정겹고 따뜻함 | 부모와 자식이 닮았을 때 거의 관용구처럼 씀 |
똑같이 ‘닮았다’를 말해도 복붙은 디지털 감각의 신조어라 젊고 건조하고, 붕어빵은 같은 틀에서 구워 낸 빵을 그린 말이라 훨씬 정겹다. 어르신께는 붕어빵 쪽이 잘 통한다.
문화 배경 — 두 글자로 줄이는 습관
복붙은 ‘복사해서 붙여넣기’에서 각 부분의 첫 글자만 남긴 말이다. 한국어 신조어에서 아주 흔한 조어 방식으로, 열심히 공부하다 → 열공, 강력하게 추천하다 → 강추, 문화상품권 → 문상이 모두 같은 방식이다. 긴 말을 두 글자로 눌러 담는 이 습관은 타자로 대화하는 환경에서 특히 빠르게 번졌다.
이 말이 자리 잡은 배경에는 한국의 메신저 문화가 있다. 카카오톡으로 계좌번호를 주고받고, 단톡방으로 공지가 돌고, 링크 하나로 약속 장소가 정해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무언가를 눌러 복사하고 옮겨 붙이는 생활에서, ‘복사해서 붙여넣기’라는 일곱 글자는 너무 길었다.
그러다 이 말은 화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남의 글을 출처 없이 퍼 온 게시물을 두고 “복붙 글”이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복붙에는 ‘성의 없음’과 ‘표절’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그래서 지금은 같은 단어가 편리함과 게으름 양쪽을 다 가리킨다.
한국 드라마에서 이 말은 대개 사무실이나 대학 강의실 장면에서 스치듯 지나간다. 밤새 보고서를 만든 신입이 선배에게 “이거 그냥 작년 거 복붙한 거 아니지?”라는 말을 듣고 얼어붙는 장면 같은 것이다. 대사의 주인공이 되는 화려한 말은 아니지만, 한국의 일상이 얼마나 빠르게 굴러가는지를 두 글자로 보여 주는 말이기는 하다.
오늘의 퀴즈
다음 중 복붙을 쓰기에 가장 어색한 자리는 어디일까?
- 친구에게 유튜브 링크를 보내며 “이거 복붙해서 검색해 봐.”
- 팀 단톡방에 공지를 옮기며 “게시판 글 복붙했어요.”
- 면접장에서 면접관에게 “지원서는 지난번 것을 복붙했습니다.”
- 친구 아버지를 처음 뵙고 “두 분 얼굴 완전 복붙이시네요.”
정답: 3번. 1번과 2번은 동작을 가리키는 중립적인 쓰임이고, 4번은 감탄에 가까워 무례하지 않다. 하지만 3번은 자기를 평가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가 한 일을 복붙이라고 표현한 경우다. 이 말에 밴 ‘손 안 대고 그대로’라는 뉘앙스 때문에, 스스로 성의가 없었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이런 자리에서는 “기존 지원서를 바탕으로 다시 작성했습니다” 정도가 맞다.
이 글의 단어 뜻풀이와 예문은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krdict.korean.go.kr)에서 가져왔으며, 해당 부분(번역 포함)은 CC BY-SA 2.0 KR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배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