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혼(jolhon) — 이혼은 아닌데, 결혼을 졸업합니다
한국 예능이나 뉴스를 보다 보면 어느 날 이런 자막이 뜬다. “저희, 졸혼했습니다.” 졸혼(jolhon)은 법적인 부부 관계는 그대로 둔 채, 부부가 서로 합의해서 함께 살지 않고 각자 독립적으로 살아가기로 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혼이 아니라서 서류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우리 남편”, “우리 아내”라고 부르고, 자식들의 결혼식에도 나란히 앉는다. 다만 사는 집이 다르고, 저녁 메뉴를 따로 정하고, 주말 계획을 서로에게 보고하지 않는다.
이 말이 실제로 가장 자주 오가는 자리는 뉴스 스튜디오가 아니라 명절 밥상이다. 상을 물리고 과일을 깎는 시간쯤, 누군가 “그 집 부부는 요즘 어떻게 지낸대?” 하고 물으면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지면서 이 단어가 나온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정확히 두 갈래로 갈린다 — “그것도 방법이지”와 “그게 이혼이랑 뭐가 달라?”
졸혼
졸혼의 핵심은 “합의”와 “담담함” 두 가지다. 이혼(ihon)이 관계를 법적으로 끝내는 말이고 별거(byeolgeo)가 갈등 중에 잠시 떨어져 지내는 말이라면, 졸혼은 싸워서 갈라서는 게 아니라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 각자 살자”고 서로 도장을 찍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이 말에는 원망이나 파탄의 온도가 거의 없다. 오히려 담담하고,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조금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졸혼은 아무 부부에게나 붙지 않는다. 이 말에는 보이지 않는 전제가 깔려 있다 — 아이를 다 키웠을 것, 부부로 지낸 세월이 충분히 길 것. 보통 50대 이후, 자녀가 결혼했거나 최소한 독립한 뒤의 부부에게 쓴다. 결혼 3년 차 부부가 졸혼했다고 하면 듣는 사람이 고개를 갸웃한다. “졸업”이라는 말이 붙으려면 다녀야 할 과정을 다 마쳤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사로는 **졸혼하다 (jolhon-hada)**로 쓰고, 좀 더 무게를 실을 때는 **졸혼을 선언하다 (jolhon-eul seoneon-hada)**라고 한다. 졸혼한 뒤의 생활은 **졸혼 생활 (jolhon saenghwal)**이다. 어른의 일을 말하는 자리가 많아서 존대형 **졸혼하시다 (jolhon-hasida)**로 나오는 경우도 잦다.
실제 대화로 보기
상황: 추석 당일 오후. 상을 물리고 부엌에서 설거지 중이다. 거실에서는 어른들이 TV를 보고 있다.
준경: 아까 큰이모가 그러시더라. 이모부랑 졸혼하기로 했대. Aunt just told me. She and her husband have decided on jolhon.
에밀리: 어? 두 분 이혼하시는 거야? Huh? Are they getting divorced?
준경: 아니, 이혼은 아니고. 서류는 그대로 두고 그냥 따로 사는 거야. No, not divorce. They keep the paperwork as is and just live apart.
에밀리: 아… 그럼 사이가 나빠지신 건 아니고? Ah… so it’s not that they had a falling out?
준경: 오히려 반대야. 이모는 제주도에 방 얻어서 그림 배우신대. 신나 죽으려고 하시더라. Actually the opposite. She got a place in Jeju to study painting. She looked thrilled.
에밀리: 와, 멋있다. 근데 할머니는 아셔? Wow, that’s cool. But does Grandma know?
준경: 아직 말도 못 꺼냈지. 어른들 앞에서 졸혼 얘기 꺼내면 바로 분위기 싸해져. She hasn’t even brought it up. Say the word jolhon in front of the elders and the room goes cold instantly.
이렇게 쓰면 어색합니다
✗ (결혼 2년 차, 부부싸움 중에) 됐어, 우리 그냥 졸혼하자. (Dwaesseo, uri geunyang jolhon-haja.) ✓ (결혼 2년 차, 부부싸움 중에) 우리 좀 떨어져서 생각할 시간 갖자. (Uri jom tteoreojyeoseo saenggak-hal sigan gatja.) → 졸혼은 오래 함께한 부부가 마음을 정리하고 담담하게 합의하는 말이다. 신혼에 홧김에 던지면 “이혼하자”보다 더 차갑게 들린다. 상대는 “너는 이미 나를 다 끝낸 사람 취급하는구나”로 받는다.
✗ (부모님께 직접) 아버지, 어머니, 두 분도 이제 졸혼하시는 게 어때요? (Abeoji, eomeoni, du bun-do ije jolhon-hasineun ge eottaeyo?) ✓ (부모님께 직접) 어머니도 이제 어머니 시간 좀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Eomeoni-do ije eomeoni sigan jom gajisyeosseumyeon jokesseoyo.) → 아무리 좋은 뜻으로 말해도, 자식이 먼저 꺼내면 “두 분 이제 그만 사세요”라는 통보로 들린다. 졸혼은 당사자가 스스로 꺼내는 말이지, 옆에서 권하는 말이 아니다.
상황별 활용 예문
1) 명절에 친척 이야기를 전할 때
큰이모는 이모부랑 졸혼하시고 지금 제주도에서 그림 배우셔. (Keun-imo-neun imobu-rang jolhon-hasigo jigeum Jeju-do-eseo geurim baeusyeo.) My aunt did jolhon with my uncle and she’s learning painting in Jeju now.
가족 소식을 전하는 가장 흔한 자리다. 뒤에 “그림 배우셔”, “등산 다니셔”처럼 지금 뭘 하며 지내는지를 붙이는 게 한국어다운 흐름이다. 졸혼이라는 말 자체가 “끝”이 아니라 “새로 시작한 것”에 방점이 있기 때문에, 근황이 붙지 않으면 듣는 사람은 자동으로 나쁜 일을 상상한다.
2) 뉴스나 기사에서 현상을 말할 때
자녀를 모두 출가시킨 뒤 졸혼을 선택하는 중년 부부가 늘고 있다. (Janyeo-reul modu chulga-sikin dwi jolhon-eul seontaek-haneun jungnyeon bubu-ga neulgo itda.) More middle-aged couples are choosing jolhon after all their children have left home.
방송·신문에서 쓰는 격식체다. “졸혼을 선택하다 / 졸혼을 선언하다”처럼 명사로 두고 동사를 붙이면 개인의 사연이 아니라 사회 현상을 다루는 톤이 된다. 학습자가 한국 기사를 읽을 때 이 형태로 가장 많이 만난다.
3) 친구끼리 반쯤 농담으로
나 애들 대학만 보내 놓고 졸혼할 거야. 진짜로. (Na aedeul daehak-man bonae noko jolhon-hal geoya. Jinjjaro.) Once I get the kids into college, I’m doing jolhon. Seriously.
40대 이후 친구들 모임에서 웃으면서 나오는 말이다. 진심이 30퍼센트쯤 섞인 농담이라 듣는 사람도 “야, 너만 그러냐” 하고 받아친다. 단, 이 농담은 또래끼리만 통한다. 배우자가 있는 자리나 시부모·장인장모 앞에서 하면 농담이 되지 않는다.
존댓말·반말과 비슷한 표현
반말은 졸혼했어 (jolhon-haesseo), 존댓말은 **졸혼했어요 / 졸혼했습니다 (jolhon-haesseoyo / jolhon-haetseumnida)**로 규칙적으로 바뀐다. 다만 이 말은 대개 손윗사람의 일을 말하게 되므로 졸혼하셨대 (jolhon-hasyeotdae), **졸혼하셨다고 들었어요 (jolhon-hasyeotdago deureosseoyo)**처럼 주체 높임 “-시-”가 붙은 형태를 훨씬 자주 만난다.
비슷해 보이는 말들의 온도 차이가 이 단어의 전부라고 해도 좋다.
| 표현 | 온도·강도 | 쓰는 자리 |
|---|---|---|
| 졸혼 (jolhon) | 합의된, 담담하고 오히려 밝음 | 자녀를 다 키운 중년 이후 부부. 뉴스·예능·친척 이야기 |
| 별거 (byeolgeo) | 무겁고 부정적, 갈등이 깔림 | 이혼 앞 단계. 조심스럽게 낮은 목소리로 |
| 이혼 (ihon) | 법적 종료, 가장 단호함 | 서류·법·공식적인 자리 |
| 각방 쓰다 (gakbang sseuda) | 가볍고 일상적, 농담도 가능 | 같은 집에 살면서 방만 따로. 코 곤다는 이유로도 씀 |
| 황혼 이혼 (hwanghon ihon) | 무겁고 결정적 | 노년에 실제로 이혼하는 경우. 졸혼과 자주 대비됨 |
같은 “따로 산다”라도 별거는 문제가 있어서 떨어지는 것이고, 졸혼은 문제를 끝내고 떨어지는 것이다. 이 한 줄만 기억하면 두 단어를 헷갈릴 일이 없다.
문화 배경 — 결혼에도 졸업식이 있다면
졸혼은 오래된 말이 아니다. 한자로 쓰면 卒婚, 곧 졸업(卒業)의 졸 + 결혼(結婚)의 혼이다. 학교를 마치면 졸업하듯 결혼도 정해진 과정을 다 마치면 졸업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이 조어는 일본어 卒婚(そつこん, 소츠콘)에서 건너왔고, 한국에서는 2010년대 중반부터 방송을 타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2017년 배우 백일섭 씨가 예능 프로그램 《아빠본색》(TV조선)에서 자신이 졸혼 상태임을 밝힌 뒤, 이 단어는 며칠 동안 포털 검색어에 머물렀다.
왜 한국에서 이 말이 그렇게 빨리 자리를 잡았을까. 배경에는 두 가지 압력이 있다. 하나는 길어진 수명이다. 자녀를 다 키우고 나서도 부부에게 30년 넘는 시간이 남는다. 다른 하나는 이혼에 여전히 따라붙는 시선이다. 자녀의 결혼, 친척들의 말, 부모님의 반응 — 법적으로 갈라서는 순간 감당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졸혼은 그 사이에 난 좁은 길이다. 관계의 형식은 지키면서 생활의 실질만 각자 가져가는 방식.
그래서 이 단어에는 늘 논쟁이 붙어 다닌다. “현실을 예쁘게 포장한 별거일 뿐”이라는 비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라는 지적, 그리고 무엇보다 “대부분 아내 쪽이 먼저 꺼낸다”는 관찰이다. 실제로 방송에서 졸혼을 말하는 사람은 평생 살림과 육아를 맡아 온 60대 여성인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졸혼은 결혼의 실패가 아니라, 미뤄 두었던 자기 시간의 시작이다.
한국 드라마와 예능에서 이 소재는 대개 자녀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부모의 졸혼 소식을 들은 자식이 처음엔 화를 내고, 부모의 집을 찾아갔다가 혼자 밥을 차려 먹는 아버지의 뒷모습이나 처음으로 자기 이름표를 단 문화센터 수강증을 든 어머니를 보고 조용히 물러서는 장면. 이 단어를 알아 두면, 그 장면에서 자막 없이도 공기가 왜 바뀌는지 읽을 수 있다.
오늘의 퀴즈
다음 중 **졸혼(jolhon)**을 가장 자연스럽게 쓴 문장은?
① 저희 부부는 지난달에 졸혼해서 서류 정리를 다 끝냈어요. ② 큰이모는 이모부와 졸혼하시고 제주도에서 그림을 배우신다. ③ 어제 남자친구랑 크게 싸워서 그냥 졸혼했어.
정답 보기
정답: ②
① 은 “서류 정리”가 걸린다. 졸혼은 법적 절차가 없는 합의라서 정리할 서류가 없다. 서류를 정리했다면 그건 이혼(ihon)이다. ③ 은 애초에 부부가 아니다. 졸혼은 혼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만 쓴다. 연인이라면 “헤어졌어 (heeojyeosseo)“가 맞다. ② 는 오래 함께한 부부, 합의, 그리고 그 뒤에 시작된 새 생활까지 모두 갖춘 가장 전형적인 쓰임이다.
이 글의 단어 뜻풀이와 예문은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krdict.korean.go.kr)에서 가져왔으며, 해당 부분(번역 포함)은 CC BY-SA 2.0 KR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배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