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메추 — 오후 여섯 시, 한국인이 매일 주고받는 세 글자
저메추
오후 여섯 시, 한국의 단톡방에는 거의 매일 같은 말이 올라온다. 저메추 (jeomechu) 는 ‘저녁 메뉴 추천’의 앞 글자만 딴 줄임말로, “오늘 저녁에 뭘 먹으면 좋을지 추천해 줘”라는 뜻이다. 배는 고픈데 뭘 먹을지 도무지 못 정하겠을 때,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배달 앱을 켜 놓고 십 분째 손가락만 굴리고 있을 때 — 그때 한국 사람들은 폰을 들어 친구에게 이 세 글자를 보낸다. “저메추 좀.”
생김새는 질문 같지만, 실제 쓰임은 부탁에 가깝다. 그래서 뒤에 ‘좀’이나 ‘부탁해’가 붙는 일이 많다. 저메추 좀 (jeomechu jom), 저메추 부탁 (jeomechu butak), 저메추 해 줘 (jeomechu hae jwo) — 셋 다 같은 말이다. 원래는 ‘저녁 메뉴 추천 좀 해 줘’라는 긴 문장이었는데, 앞의 세 글자만 남고 뒤는 통째로 생략된 채 굳어 버렸다. 그래서 문법책으로 뜯어보면 이상하다. 명사 하나가 문장 전체 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온도는 세 가지쯤 된다. 첫째는 진짜 결정을 못 하겠을 때다. 이때는 정말로 답을 기다린다. 둘째는 심심해서 말을 걸 구실이 필요할 때다. 한국에서 “밥 먹었어?”가 안부 인사인 것과 같은 자리에 저메추가 있다. 셋째는 이미 답을 정해 놓았을 때다. 마라탕이 먹고 싶은데 누가 “마라탕”이라고 말해 주기를 기다리는 상태. 셋 중 어느 쪽이든 공통점은 하나다. 이 말은 혼자 있는 사람이 남에게 말을 붙이는 방식이라는 것.
덧붙이면, 이 말은 받는 쪽에서도 쓴다. 추천을 해 주는 사람이 저메추 받습니다 (jeomechu batseumnida) 라고 농담처럼 운을 떼거나, 잘 먹고 나서 저메추 성공 (jeomechu seonggong) 이라고 결과를 보고하기도 한다. 세 글자짜리 줄임말 하나가 부탁 → 응답 → 후기까지 한 세트로 돌아가는 셈이다.
실제 대화로 보기
상황: 금요일 저녁 6시 20분, 퇴근길 지하철. 두 사람 다 손잡이를 잡고 한 손으로 폰을 보고 있다.
준경: 아, 배고파 죽겠다. 너 오늘 저녁 뭐 먹어? Ugh, I’m starving. What are you having for dinner today?
에밀리: 몰라, 아직 못 정했어. 저메추 좀. No idea, haven’t decided yet. Give me a dinner rec.
준경: 음… 날도 쌀쌀한데 순댓국 어때? Hmm… it’s chilly out, how about sundae-guk?
에밀리: 어제 국밥 먹었어. 다른 거. I had gukbap yesterday. Something else.
준경: 야, 이럴 거면 저메추는 왜 받아. 그냥 네가 먹고 싶은 거 말해. Hey, why even ask for a dinner rec if you’re gonna do that. Just say what you want.
에밀리: ㅋㅋㅋ 들켰네. 나 사실 아까부터 마라탕 생각났어. Hahaha, busted. Honestly I’ve been thinking about malatang this whole time.
마지막 두 줄이 이 표현의 진짜 얼굴이다. 한국에서 저메추를 부탁한 사람은 열에 예닐곱은 이미 답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저메추 받아 놓고 다 싫대”는 단톡방의 오래된 농담거리다.
이렇게 쓰면 어색합니다
✗ (부장님께) 부장님, 저메추 좀 해 주세요. ✓ (부장님께) 부장님, 이 근처에 저녁 드실 만한 데 있을까요? → 문법은 멀쩡하지만 자리가 어긋난다. 저메추는 또래끼리 쓰는 인터넷 줄임말이라, 손윗사람이나 거래처에 쓰면 회식 자리를 장난처럼 대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윗사람에게는 줄이지 말고 문장을 다 펴서 말하는 편이 안전하다.
✗ (오전 11시 40분, 친구 단톡방에서) 얘들아, 저메추! ✓ (오전 11시 40분, 친구 단톡방에서) 얘들아, 점메추! → 이 말에는 시간표가 붙어 있다. 저메추의 ‘저’는 저녁이라서, 점심때 쓰면 “아침에 잘 자”라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 점심은 점메추 (jeommechu, 점심 메뉴 추천). 같은 방식으로 아침이나 야식 버전을 만들어 쓰는 사람도 있지만 훨씬 드물고, 실제로 굳어져 널리 쓰이는 것은 저메추와 점메추 둘이다.
상황별 활용 예문
① 냉장고 앞에서 항복했을 때 (친구 단톡방)
혼자 사는 사람이 저녁 시간에 가장 자주 겪는 장면이다.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라, 고를 힘이 없어서 남에게 넘긴다.
얘들아 저메추 좀. 나 냉장고 앞에서 십 분째 서 있어. (yaedeura jeomechu jom. na naengjanggo ape sip bunjjae seo isseo.) Guys, someone recommend a dinner. I’ve been standing in front of the fridge for ten minutes.
② 추천을 해 주는 쪽일 때 (연인·가족)
요청을 받았을 때는 메뉴만 던지지 않고 이유를 붙이는 게 한국식이다. 날씨, 어제 먹은 것, 지금 기분이 근거가 된다.
저메추 받습니다. 비 오니까 오늘은 무조건 칼국수지. (jeomechu batseumnida. bi onikka oneureun mujokkeon kalguksuji.) Taking dinner requests. It’s raining, so it’s got to be kalguksu today.
③ 다 먹고 나서 (SNS·유튜브 댓글)
한국 인터넷에서는 추천을 받았으면 결과를 보고하는 문화가 있다. 짧게 한 줄이면 충분하다.
어제 저메추 고마워. 완전 성공했어. (eoje jeomechu gomawo. wanjeon seonggonghaesseo.) Thanks for the dinner rec yesterday. Total success.
존댓말·반말과 비슷한 표현
저메추에는 사실상 존댓말 형태가 없다. ‘저메추 해 주세요’라고 어미만 높여도 어색한데, 말 자체가 또래 사이의 가벼운 말투를 전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격식이 필요한 자리에서는 아예 다른 문장으로 갈아타야 한다.
| 표현 | 온도·강도 | 쓰는 자리 |
|---|---|---|
| 저메추 (jeomechu) | 가볍고 친근, 살짝 장난기 | 또래 단톡방·SNS·댓글. 윗사람에겐 안 씀 |
| 점메추 (jeommechu) | 저메추와 똑같음, 시간대만 다름 | 점심 직전, 대략 11시~12시 |
| 뭐 먹지? (mwo meokji?) | 중립, 혼잣말에 가까움 | 어디서나. 답을 꼭 기대하진 않음 |
| 저녁 뭐 먹을까? (jeonyeok mwo meogeulkka?) | 중립·다정 | 같이 먹을 사람에게. 가족·친구·연인 |
| 저녁 메뉴 좀 추천해 주시겠어요? (jeonyeok menyu jom chucheonhae jusigesseoyo?) | 정중·격식 | 윗사람·거래처·처음 만난 사이 |
특히 셋째 줄과 넷째 줄의 차이가 학습자에게 유용하다. 뭐 먹지? 는 나 혼자 먹을 것을 고민하는 말이고, 저녁 뭐 먹을까? 는 우리 둘이 같이 먹을 것을 고르자는 말이다. 저메추는 이 둘 사이에 있다. 먹는 건 나 혼자인데, 고르는 일은 너에게 맡기는 자리.
문화 배경 — 여섯 시의 결정 피로
조어 방식은 단순하다. 저녁 메뉴 추천에서 각 어절의 첫 글자만 떼어 붙였다. 한국 인터넷 줄임말의 가장 흔한 공식이고, 그래서 원말을 알면 처음 보는 줄임말도 절반쯤 읽힌다. 이 공식은 확장도 쉬워서, 점심으로 바꾸면 점메추가 된다.
이 말이 왜 하필 매일의 의식이 되었는지는 배달 앱을 한 번만 켜 보면 안다. 화면에는 치킨, 족발, 마라탕, 돈가스, 국밥, 샐러드가 끝없이 이어지고,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고르는 일은 즐거움이 아니라 노동이 된다. 하루 종일 일하고 나서 마지막 남은 판단력을 저녁 메뉴에 쓰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판단을 남에게 외주 준다. 저메추는 배고픔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결정 피로의 언어다.
한 겹 더 있다. 한국에서 “밥 먹었어?”는 정보를 묻는 말이 아니라 안부를 묻는 말이다. 상대의 하루가 괜찮았는지를 밥으로 에둘러 묻는 오래된 습관이 있고, 저메추는 그 습관의 요즘 버전이다. 혼자 사는 사람이 저녁 여섯 시에 단톡방에 “저메추 좀”이라고 던지면, 그건 메뉴를 묻는 동시에 “나 지금 심심해, 누구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답이 “아무거나”여도 대화는 이어진다. 애초에 목적이 메뉴가 아니었으니까.
한국 드라마나 예능에서도 이 장면은 익숙하다. 회사 동료들이 퇴근 직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저녁 메뉴를 두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늘 가던 그 집으로 걸어가는 장면. 한국 콘텐츠를 보다가 인물들이 유난히 “뭐 먹지”를 오래 이야기한다면, 그건 각본이 늘어진 게 아니라 실제 한국의 저녁이 그렇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오늘의 퀴즈
오전 11시 50분, 친구들 단톡방에 “뭐 먹을지 골라 줘”라고 하려면 어떤 말을 써야 할까요?
- 저메추
- 점메추
- 저메추 해 주시겠어요?
정답 보기
정답: 2번, 점메추 (jeommechu)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점심 메뉴 추천’의 줄임말인 점메추가 맞습니다. 1번 저메추는 저녁에만 씁니다. 3번은 줄임말에 존댓말 어미를 억지로 붙인 형태라 친구 사이에서는 어색하고, 윗사람에게는 “점심 메뉴 좀 추천해 주시겠어요?”처럼 문장을 다 펴서 말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글의 단어 뜻풀이와 예문은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krdict.korean.go.kr)에서 가져왔으며, 해당 부분(번역 포함)은 CC BY-SA 2.0 KR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배포됩니다.